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과 함께 돌아보는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지 2탄
지난 21일,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충격과 아픔으로 남은 소식이 있었습니다.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선종입니다. 최근 심각한 폐렴 때문에 입원했다가 회복해 교황청으로 돌아온 뒤 활동을 재개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뇌졸중으로 혼수상태에 빠지고 회복 불가능한 심부전을 일으켜 하니님의 곁으로 영원히 떠나게 되었습니다. 전날 남긴 생전 마지막 부활절 강론에서는 "전쟁 당사자들에게 휴전을 촉구하고 인질을 석방해 평화의 미래를 열망하는 굶주린 이를 도와줄 것을 호소한다"는 사실상의 마지막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그분은 교황청 역사상 가장 겸손한 지도자로 기억될 인물이며, ‘가난한 이를 위한 교황’, ‘이웃의 벗’, ‘지구의 수호자’로 불렸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 천주교 신자들에게도 특별한 인연이 있는 인물입니다.
2014년 방한 당시 한국의 103위 순교성인 시복식, 세월호 유족 면담, 소외된 이웃과의 만남 등을 통해 신자들의 가슴속 깊은 울림을 남겼으며, 한반도 평화의 메시지를 발표했습니다. 그의 선종 소식은 단순한 이별을 넘어, 전 세계 신자들에게 신앙의 본질을 되돌아보게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를 기리며 믿음의 길을 다시 걷고자 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정신을 따라 순례할 수 있는 한국의 대표 성지들을 소개합니다.
1. 명동 주교좌 성당 - 서울의 심장
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길 74
서울 한복판, 번화한 명동 거리에 자리 잡은 고딕 양식의 아름다운 성당. 명동 주교좌성당은 한국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본당이자, 한국 가톨릭의 상징적인 성지입니다. 1898년 완공된 이 성당은 한국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역사를 담고 있으며, 현재는 문화재로도 지정되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방한 당시 이곳에서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가졌고, 이후 많은 신자들이 이곳을 그와의 만남의 장소로 여겨 순례지로 찾고 있습니다.
성당 내부의 붉은 벽돌과 스테인드글라스, 그리고 순교자 묘역은 신앙의 역사와 미래가 공존하는 공간입니다.
2. 광희문 - 믿음의 출입문
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길 74
서울 중구 신당동에 위치한 광희문은 조선시대 사형장으로 통하는 문 중 하나였으며, 천주교 박해기 당시 순교자들이 마지막으로 지나간 문이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수많은 가톨릭 선교사들과 신자들이 처형당했는데, 이때 친지를 찾지 못한 시신들은 당시 시구문이었던 광희문을 통과해 바깥에 버려졌습니다. 총 순교자 중 794명의 시신이 광희문을 통해 버려졌는데 그중 54구는 신유박해(1801)에서 병오박해(1846) 시기에, 나머지 740구는 병인박해(1866)에서 기묘박해(1879) 시기에 버려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성인 103위 중 44위, 복자 124위 중 27위가 이곳에 묻히고 유기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에 따라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1999년 5월에 현양탑을 설치하고, 2008년 4월에는 제대를 설치하였으며 2014년 8월에 광희문 앞에 순교현양관을 설치했습니다.
지금은 성곽 일부와 문이 복원되어 있으며, 광희문 순례길은 많은 신자들이 순교자의 발자취를 되새기기 위해 걷는 코스가 되었습니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강조했던 ‘순교는 믿음의 씨앗’이라는 메시지를 깊이 묵상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3.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성당 - 신앙과 교육의 만남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296-12
서울 혜화동에 위치한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은 한국 가톨릭 교육의 중심지이며, 이곳에 위치한 성신교정 성당은 사제 양성과 영적 성숙의 중심 공간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한 김대건 신부님의 시신은 여러 신자들에 의해 와서(지금의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서 야고보, 박 바오로, 한경선, 이민식 등 몇몇 신자들이 다시 미리내로 이장하였습니다. 그 후 1886년 기해, 병오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조사를 할 때 교구 재판 판사인 프와넬 신부가 미리내에 있던 봉분 중앙을 헤치고, 관을 묻은 뒤에 구덩이 위를 덮는 넓은 나무 판인 횡대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1901년 5월 21일에는 프와넬 신부와 드망즈 신부, 안성 본당 공베르 신부, 미리내 본당 강도영 신부가 참여한 가운데 유해를 발굴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횡대는 봉분 안에 다시 넣고 원상태로 봉분을 쌓았으며 발굴된 유해는 강도영 신부의 사제관에 안치하였다가 5월 23일에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 안치하였습니다. 이후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는 6·25 전쟁 당시 이재현 신부에 의해 비밀리에 성당 옆 성모상 아래 숨겨지기도 했고, 전쟁이 더욱 심각해지던 1950년 9월 28일에는 경남 밀양으로 피난 가 있던 소신학교로 옮겨 모셔졌다가, 전쟁이 끝난 후 혜화동 소신학교 성당으로 옮겨 안치되었습니다.
그리고 1960년 7월 5일 신축 중이던 성신교정 성당이 완공되자, 유해 가운데서 하악골을 미리내 경당으로, 치아는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으로 분리, 안치시키고 나머지 유해는 성당으로 옮겨와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1994년 2월 성당 수리공사를 할 때 새로 석관묘를 제작하여 옮겼으며, 1901년부터 1994년 2월 24일까지 사용했던 기존의 목관과 대리석판은 학교 내 전례박물관으로 옮겨 소장하고 있습니다.
1900년대 초 세워진 이 성당은 수많은 신학생들과 교수, 사제들이 기도하고 머무르며 하느님의 뜻을 배우는 장소였습니다. 현재도 이곳은 학교 시설이기에 학기 중에는 방문 제약이 많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조했던 “신앙은 학문을 넘어 삶으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이 성당은 외부에도 개방되어 있어, 조용한 신앙의 쉼터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4. 강릉 대도호부 관아 - 박해 속 신앙의 흔적
위치 : 강원도 강릉시 임영로 131번길 6 임영관
강원도 강릉에 있는 대도호부 관아는 조선시대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으며, 기해박해(1839년) 때 강릉에서 체포된 신자들이 이곳에서 심문과 고문을 받고 순교한 장소입니다. 강릉 대도호부 관아에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시대 관청 건물인 칠사당은 호적, 농사, 병무, 교육, 세금, 재판, 풍송에 관한 7가지 정사를 시행하던 곳입니다. 이곳 칠사당과 그 뒤편의 임영관에서 많은 교유가 합당한 심문도 없이 모진 고문을 받고 참수되었습니다. 지금은 유서 깊은 문화유산이자 천주교 순례지로 지정되어 있으며, 관아 내부에 순교자 기념비와 묵상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조용히 기도할 수 있는 장소로 활용됩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신앙은 편안함이 아닌 도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강릉의 이 성지는 신자들이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감내한 고통의 기억을 간직한 의미 깊은 장소입니다.
5. 수리치골 성모 성지 - 산속의 기적과 묵상의 동굴
위치 : 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용수봉갑길 544
이곳은 천주교 박해시대에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살던 교우촌 깊은 산 골짜기로 "수리치골" 이란 지명은 수리취 나물이 많이 나던 골짜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성모 성심회"라는 신심 단체가 이곳에서 조직된 뜻깊고 의미 있는 장소로, 기도하던 중 여러 차례 은총 체험과 성모님의 보호를 받았다는 증언이 전해지며 성지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첫 사제였던 김대건 신부와 1846년 같이 조선에 입국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가 병오박해를 피하여 이곳에서 피신하였습니다. 1836년 프랑스 파리의 승리의 성모성당 데쥬내트 신부가 창설한 단체로서, 성모성심을 특별히 공경하고, 성모성심의 전구를 통하여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는 신심 단체입니다. 기록에만 남아 있던 수리치골은 1985년 미리내성모수녀회 설립자인 정행만 신부에 의해 위치가 확인되어 본격적으로 성지로 개발되었습니다. 깊은 산골짜기, 사람의 손이 많이 닿지 않은 조용한 자연 속에 위치한 수리치골 성모 성지는 한국 천주교 신자들에게 묵상과 치유, 기도의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이곳의 중심인 자연 동굴 성모상은 성모 발현지 못지않은 신비함을 간직하고 있으며, 많은 신자들이 병 낫기를 기도하거나 묵상을 위해 조용히 찾아옵니다. 산길을 따라 조성된 십자가의 길, 묵상 동산, 소성당 등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하느님과 가까워질 수 있는 여정을 가능하게 해 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남긴 말 중 “가장 깊은 기도는 가장 조용한 순간에 찾아온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 뜻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이 수리치골 성모 성지일 것입니다.
복잡한 세상에서 벗어나 하늘을 향해 열리는 그 작은 골짜기에서, 오늘 우리의 기도도 성모님의 품 안에 잠시 머물 수 있기를 바랍니다.
6. 천안 성거산 성지 - 조선시대 신앙공동체의 흔적
위치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 납안리 산46-1외 2
충남 천안에 위치한 성거산 성지는 19세기 초 박해를 피해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신앙 활동을 했던 흔적이 남아있는 곳입니다. 프랑스인 선교사 칼래 신부는 성거산 천주교 교우촌터(소학골)를 경상도와 충청도, 경기도 일부 지역의 선교 거점으로 삼았는데, 이곳이 신앙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1866년 병인박해로 큰 희생을 치렀습니다. 이 가운데 소학골 출신의 배문호(베드로), 고요셉, 최천여(베드로), 최종여(라자로) 등은 교황청에서 성인의 전단계인 '복자'로 선포하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는 중입니다. 이들의 유해는 무명 순교자 등과 함께 제1줄 무덤, 제2줄 무덤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성거산 천주교 유적은 교유촌의 지형과 생활 유적이 기족과 증언으로 보존되고 있어, 초기 한국 천주교의 전형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지금은 십자가의 길, 성당, 기도의 언덕, 순교자 묘역이 함께 조성되어 있어 가족 단위나 개인 순례자들에게 인기 있는 성지입니다. 이곳은 단순한 기도처를 넘어, 서로를 보호하고 가르치며 신앙을 지킨 공동체의 상징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한 “공동체적 사랑은 신앙의 뿌리”라는 메시지를 되새기기에 좋은 장소입니다.
7. 해미 순교성지 - 순교자들의 피로 적신 땅
위치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성지1로 13
이곳은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자행된 천주교 박해 때 충청도 각 고을에서 붙잡혀 온 천주교 신자 1,000여 명이 생매장당한 곳입니다. 조선시대에는 해미 현감이 충청좌도의 국사범을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천주교 신자들을 해미읍성 서문 밖의 돌다리에서 처형하였습니다. 그런데 1866년 병인박해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자 해미천에 큰 구덩이를 파고 모두 생매장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죽음을 앞둔 천주교 신자들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기도를 하였는데, 마을 주민들이 이 소리를 [여수머리]로 잘못 알아들어 이곳을 [여숫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 후 1935년 서산성당 범바로 신부가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순교자들의 유해 중 일부를 발굴하면서 박해의 전모가 드러났습니다. 발굴된 유해는 상홍리 공소에 임시 안장되었다가 1995년에 이곳으로 다시 옮겨와 보존 중입니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들이 홍보, 모금 활동을 벌여 2003년에 성지를 조성하여, 해미성지성당과 함께 16m 높이의 [해미순교탑], [무명순교자의 묘]를 건립하였습니다. 2014년에는 로마 교황청이 해미 순교자 3명을 가톨릭교회 공적 공경 대상인 복자로 추대하고 교황 프란체스코가 직접 방문하여 미사를 집전했고, “이곳은 순교자의 피가 말하는 장소”라고 강조했습니다.
그의 발걸음이 닿았던 이 성지는 한국 천주교의 뿌리를 가장 명확하게 느낄 수 있는 거룩한 공간입니다.
마무리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르침을 따라, 다시 걷는 신앙의 길, 그분은 우리에게 신앙의 본질이 사랑과 실천, 겸손과 나눔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의 선종은 단지 이별이 아닌, 그가 남긴 발자취를 따라 우리 삶에서 신앙을 실현하라는 초대입니다.
명동성당에서의 기도, 해미 성지의 미사, 광희문을 지나 순교한 이들, 수리치골에서의 침묵 속 묵상— 그 길들을 천천히 걷다 보면, 우리도 그와 함께 신앙의 여정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제,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기억하며 순례의 가방을 다시 메고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믿음의 길’을 함께 걸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